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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교사의 윤리, 시 낭송, 감정 강요

by borybory-click 2025. 4. 30.

영화 &lt;나의 작은 시인에게&gt; 관련 사진

 

  • 개봉일: 2019. 04. 04.
  • 장르: 드라마
  • 평점: 8.50
  •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97분
  • 감독: 사라 콜랑겔로
  • 주연: 매기 질렌할, 파커 세바스

 

1. <나의 작은 시인에게> 속 교사의 윤리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The Kindergarten Teacher)>는 언뜻 보면 천재적 재능을 가진 아이와 그를 지켜보는 어른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이 작품이 정말 다루고 있는 것은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질 수 있는 정서적 침해와 권력의 작동 방식이다. 교육은 보통 긍정적인 이미지로 소비된다. 아이의 가능성을 이끌어내고, 자율적 사고를 돕는 신성한 영역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이미지의 이면, 즉 ‘교육’이라는 명분이 얼마나 쉽게 어른의 욕망과 결합되어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차분하면서도 날카롭게 그려낸다.

주인공 리사는 평범한 유치원 교사로서 안정된 일상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안정성과는 달리, 그녀는 내면 깊숙이 공허와 좌절감을 안고 있다. 그녀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으며, 시 창작 강좌에 참여하면서 작가로서의 자아를 찾으려 애쓴다. 그러나 그 노력은 번번이 좌절되고, 그녀가 쓴 시는 특별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녀는 교사로서의 역할도 성실하게 수행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일상이 무기력하게 느껴지고,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러던 중 라사로라는 유치원생이 우연히 읊은 시를 듣고, 그녀는 일종의 각성을 경험한다. 아이의 말 한마디, 짧은 구절 하나가 그녀가 평생 갈구해 온 시적 진실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리사는 처음에는 감탄과 보호 본능에서 아이의 시를 받아 적고, 그것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점점 그녀는 아이의 재능에 대해 집착하게 되고, 그 재능이 주는 대리 만족에 중독되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이 다니는 창작 수업에서 라사로의 시를 낭송하며 찬사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리사는 처음으로 창작자 혹은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인정이 자신이 쓴 것이 아닌, 아이의 언어에서 비롯된 것이며, 아이의 동의도 없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서 교육과 침해의 경계는 이미 흐려지기 시작한다. 리사는 아이의 시를 보호하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믿기 시작한다. 아이의 아버지, 보모, 유치원 체계 등 주변 사람들을 무능하고 무관심하다고 여기며 자신만이 진짜로 아이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이 확신은 점점 강해지고, 리사는 라사로의 일상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아이가 시를 더 많이 쓰도록 유도하고, 시에 대한 감상을 요구하며, 때로는 아이가 쓰지 않을 때 실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중요한 점은 이 모든 행동이 아이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라사로가 정말로 시를 계속 쓰고 싶어 하는지, 혹은 그것을 즐기는지를 묻지 않고, 단지 시적 재능이라는 이유로 지속적인 창작을 강요한다. 결국 그녀는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리고 나와 호텔에 감금하다시피 데려가며 시를 쓰게 만든다. 이 장면은 리사가 교육의 윤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아이의 삶을 통제하려 든 순간을 상징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교육이라는 외피가 벗겨지고, 그 안에 숨겨진 소유욕, 인정 욕구, 창작에 대한 갈증 같은 개인적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리사의 교육은 더 이상 교육이 아니다. 그것은 일방적 간섭이며, 심리적 폭력이다. 리사의 행동은 흔히 볼 수 있는 교육적 열정과는 다르다. 그녀의 열정은 아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이를 이용하는 것이다. 특히 예술이라는 고귀한 대의를 앞세워 라사로의 자율성과 감정을 무시하고, 그를 예술적 도구로 대하는 태도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교육자에게 주어진 권력은 아이를 가르치는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인생에 깊이 개입할 수 있는 위험한 칼날이 될 수 있다. 이 칼날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할 때, 교육은 가장 은밀하고 지속적인 침해가 된다. 영화는 리사의 시선과 감정선을 따라가지만, 동시에 라사로의 침묵과 표정을 통해 무언의 거부와 저항을 보여준다. 아이는 시를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혼란을 느끼고, 점점 말을 줄이며, 결국 침묵으로 저항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리사가 펜을 쥐어주며 시를 쓰라고 말할 때, 라사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그 침묵은 단순한 두려움이나 긴장이 아닌, 스스로의 감정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자, 리사의 침해에 대한 가장 조용하고 강력한 거부다. 교육은 아이가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리사의 방식은 주체를 지우고, 교사의 이상을 강요하는 형태였다. 이는 현실 속 교육 현장에서도 자주 반복되는 문제다. ‘너를 위한다’는 말로 시작된 개입이 아이의 자유를 박탈하고, 결국 교육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변질되는 일은 결코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진짜 교육은 아이의 가능성을 지켜보는 일이며, 스스로의 리듬에 따라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다.

이 영화는 교사의 윤리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를 날카롭게 묻는다. ‘좋은 의도’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변명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교육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리사의 행위는 예술을 위한 보호가 아니라, 자신의 실패를 보상받기 위한 무의식적 조작이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에게 돌아간다. 침묵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켜낸 라사로는 말보다 더 강력한 방식으로 리사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진짜 교육은 지도자의 욕망이 아니라, 배움의 주체인 아이의 권리를 중심에 둘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그 사실을 단호하게, 그리고 조용히 말하고 있다.

 

2. 시 낭송은 감동인가 세뇌인가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The Kindergarten Teacher)>는 시라는 언어가 가진 힘을 중심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시가 단순히 문학 텍스트가 아니라 감정과 기억, 권력과 교육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서서히 드러낸다. 그중에서도 ‘시의 낭송’이라는 행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낭송은 단순히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리듬과 억양, 감정을 실어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 영화에서는 시를 낭송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관객에게 특별한 울림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낭송이 순수한 감동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타인의 감정을 조작하거나 통제하는 방식으로도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의 낭송은 본래 청자에게 감정을 이입시키고, 텍스트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예술 행위로 여겨진다. 리사는 라사로가 읊는 시를 듣고 처음에는 순수한 감동을 느낀다. 그가 어떤 교과서도 배우지 않았고, 문학적 기교도 습득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낸 시는, 오히려 그 때문인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아이의 시에는 어른의 관습적 언어가 배제되어 있고, 설명이 아닌 직관으로 구성된 문장이 반복된다. 리사는 그 시를 단지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반복해 낭송하고, 심지어 자신의 시 창작 수업에서 본인 것처럼 읽어낸다. 그 행위는 단순한 감동의 재현을 넘어서, 타인의 언어를 빌려 감정과 인정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확장된다. 이 과정에서 시의 낭송은 점차 그 본래의 목적을 넘어선다. 낭송이 처음에는 감탄과 존중의 표현이었다면, 시간이 갈수록 리사에게는 수단으로 변질된다. 그녀는 시를 낭송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예술적 자존감을 회복하려 한다. 그녀는 청중이 감동하는 모습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끼고, 그 감동의 대상이 자신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단순한 시의 감정 전달이 아닌, 감정 조작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즉, 낭송이라는 예술 행위가 타인의 감정을 움직이는 데 성공할수록,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통제의 도구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리사는 라사로에게 시를 계속해서 읊도록 요구한다. 처음에는 자연스럽던 라사로의 시가 점점 강요된 낭송으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시와 낭송이 더 이상 창의적 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통제와 기대의 장치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리사는 아이의 자율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시를 말하게 하고, 그 시를 특정한 방식으로 낭송하길 원한다. 그녀에게 시는 이제 감동의 원천이라기보다, 자신이 잃어버린 예술적 가능성을 되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 지점에서 시의 낭송은 감동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감정 주입의 방식으로 바뀐다. 시 낭송이 감동과 세뇌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이유는, 그 행위가 본질적으로 감정 이입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반복적으로 들은 언어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되고, 특히 그 언어가 감정을 실은 낭송이라면 그 영향은 더욱 크다. 시가 정제된 언어로 삶의 순간을 재현한다면, 낭송은 그 순간을 소리로 되살리는 마술과도 같다. 하지만 그 마술이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반복되고 조율된다면, 그것은 감동이 아니라 감정의 훈육이 된다. 리사는 라사로에게 감탄하면서도, 그가 더 이상 시를 말하지 않자 좌절하고 강요한다. 이때 시는 창작이 아닌 순응이 되며, 낭송은 표현이 아닌 지시가 된다. 이 영화가 주는 인상은 단지 시와 예술의 가치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시의 낭송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쉽게 감동과 세뇌 사이를 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미묘한 심리극이기도 하다. 시가 지닌 언어의 힘은 그것을 말하는 이의 진정성과 연결될 때만 진짜 감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언어가 누군가에 의해 반복되고 강요되는 순간, 청자는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동을 강제로 느끼도록 훈련받는 것이다. 리사는 시를 사랑했지만, 아이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공허함을 채우려 했고, 그 과정에서 감동을 세뇌로 바꾸는 데 일조했다.

결국 라사로는 시를 멈추고 침묵한다. 이는 단순한 말의 부재가 아니다. 그는 더 이상 타인의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의 침묵은 낭송을 통한 감정 전달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결이자, 감동이라는 이름 아래 가해졌던 강요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리사는 그 침묵 앞에서 무력해지고, 영화는 이 순간을 통해 시의 낭송이 누군가의 감동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 통제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확실히 각인시킨다. 교육, 예술,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말들이 언제 감정적 억압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시의 언어가 가진 힘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조용히 드러낸다.

 

3. 감정을 강요당하는 아이의 시선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The Kindergarten Teacher)>는 예술, 교육, 윤리라는 키워드를 교차시키며, 감정과 창의성의 진정한 의미를 되짚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리사라는 유치원 교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라사로라는 다섯 살 아이가 있다. 리사는 이 아이의 시적 재능에 매혹되어 그의 세계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며, 아이의 감정과 표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대신,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고 강요한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아이의 재능을 보호하려는 교사의 선한 의도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감정을 강요당하는 아이의 침묵과 저항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관점을 바꿔, 라사로라는 아이의 시선에서 이 이야기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라사로는 뛰어난 시적 감각을 가진 아이로 등장한다. 그는 특별한 가르침 없이도 말의 리듬과 이미지, 감정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한다. 그의 시는 때로는 난해하고 때로는 아름답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시들이 어른의 기대나 칭찬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라사로의 감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언어였다는 점이다. 아이는 그저 떠오른 감정을 말로 표현했을 뿐인데, 주변 어른들은 그것을 재능이라 말하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특정한 감정과 태도를 반복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라사로가 시를 지어내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그것을 즐기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했다. 하지만 리사의 개입은 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고, 감정의 방향을 조종하려는 통제로 바뀐다. 리사는 처음에는 라사로의 시를 조용히 받아 적고, 아이의 세계를 관찰하는 듯했다. 하지만 시를 통해 예술적 감동을 받은 이후부터는 점점 아이가 계속 시를 쓰기를 기대하고, 때로는 그것을 유도하기 위해 대화를 이끌고, 감정을 자극하려 한다. 리사의 이러한 접근은 아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보다는, 특정 정서 상태를 지속적으로 끌어내려는 시도로 보인다. 라사로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감정이 아닌, 어른이 기대하는 감정을 표현해야만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된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본래 자발적이고 내면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아이는 감정을 요구받고, 표현해야 할 이유를 부여받는다. 이는 유아 교육의 윤리적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아이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일은 언뜻 보기엔 섬세한 요청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반복되고 구조화되면 그것은 압력이 되고, 아이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요소가 된다. 라사로는 리사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기대’를 느끼게 되고,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어른이 실망할 것이라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러한 심리적 상황은 아이가 점차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검열을 시작하게 만든다. 자발적인 창작이 검열과 조건부 인정의 틀 속에 들어갈 때, 아이는 자신이 진짜 느끼는 감정보다, 어른이 바라는 감정을 우선하게 된다. 이는 창의성 교육에서 가장 우려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창의성은 자유로운 감정의 흐름과 직결되어 있으며, 그것을 강요하는 순간 진정성을 잃고 기능 중심으로 전락한다. 라사로는 침묵을 선택한다. 처음에는 자신도 모르게 멈추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서 그는 점차 리사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시를 요구하는 손짓에도 무반응으로 일관한다. 이는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감정을 통제당했던 경험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이다. 말은 하지 않지만, 그의 침묵은 또 다른 언어로 기능한다. 아이는 시를 쓰는 행위가 더 이상 즐겁지 않으며, 자신의 감정이 오히려 무언가를 위해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 침묵은 그가 주체로서 선택한 첫 번째 행동이며, 감정을 감정으로 되찾으려는 무언의 의지이다. 이 영화는 유아 교육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창의성과 감정 표현의 윤리에 대해 깊은 사유를 제시한다. 어린아이에게 감정을 표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창의성을 위한 교육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일정한 방향성과 빈도로 반복된다면 감정 훈련, 나아가 감정 통제가 될 수 있다. 리사의 개입은 결국 라사로의 시적 자율성을 침해하며,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형태로 발전한다. 이는 오늘날 창의성 교육이 가진 딜레마와도 연결된다. 아이가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과, 표현을 요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표현을 위한 공간과 수용, 그리고 표현하지 않을 권리까지도 존중받는 상태이다.

라사로는 시를 멈췄고, 결국 자신의 감정을 다시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선택을 했다. 그는 여전히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더 이상 타인을 위한 시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리사라는 교사를 통해 예술과 교육의 역할을 재조명하지만, 동시에 라사로라는 아이의 침묵을 통해 그 모든 교육이 반드시 감정을 기반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아이는 표현의 대상이 아니라 표현의 주체이며, 그 감정을 지켜주는 것이 진짜 교육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잊지 않게 한다.